유럽통합의 아버지
“얘야, 책은 한 권도 가져가지 마라. 창 너머 세상을 유심히 보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봐라.” 장 모네의 아버지는 1904년 16세 된 아들을 런던으로 보내며 당부했다. 모네는 프랑스 코냑지방의 부유한 코냑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엔 잘 적응하지 못했다. 10세 무렵엔 저능아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모네를 영국으로 보내 코냑 장사에 긴요한 영어와 장사 수완을 배우게 했다.
모네는 몇 년 동안 런던에서 지낸 후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이집트, 캐나다, 미국을 돌며 시야를 넓혔다. 1차대전 때 연합군 군수물자 조달을 도운 인연으로 국제연맹 사무부총장으로 4년 일했다. 이후 그는 국제금융인으로 폴란드·루마니아의 화폐 안정화와 경제 재건을 거들고 미국에선 은행을 세웠다. 장제스의 초청을 받아 중국 철도망도 다시 짰다. 2차대전 중엔 루스벨트가 가장 잘 귀를 기울이는 군수 전문가였다.
모네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타협과 연합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는 1943년 프랑스 망명정부의 알제리 회의에서 연설했다. “유럽 국가들이 (종전 후) 민족 주권의 토대 위에 재구성된다면 유럽에는 평화가 없다. 유럽은 각 나라들이 번영과 사회 발전을 보장하기엔 너무 작다. 유럽도 연방이 돼야 한다.” 보불전쟁부터 세 차례나 참혹한 전면전을 치른 유럽과, 연방제로 번영을 누리는 미국을 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전후 프랑스 경제계획청장이 된 모네는 꿈의 실현에 나섰다. 첫 성과가 유럽의 석탄·철강 산업 공동관리였다. 모네는 이를 제의한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의 1950년 ‘슈망 선언’을 기초했고 이태 뒤 출범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의 초대 의장이 됐다. 그는 이어 군대를 통합하는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을 제안했다. 드골의 반대로 이 구상이 좌절되자 모네는 ‘유럽합중국을 위한 행동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의 활동으로 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이 체결됐다. 이듬해 로마조약이 발효되면서 출범한 것이 유럽연합(EU)의 전신 유럽경제공동체(EEC)다. 로마조약이 맺어진 날을 기점으로 삼아 어제 EU가 창립 50년을 맞았다. EU는 모네 탄생 100년이 되던 1988년을 ‘모네의 해’로 선포해 ‘유럽 통합의 아버지’에게 경의를 바쳤다. 한 사람의 꿈이 지닌 힘은 이토록 위대하다. “국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결합하자는 것”이라던 모네의 이상은 민족국가들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시아에도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