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혈관 길이는 장장 10만㎞. 한 줄로 편다면 지구를 두 바퀴 반 감을 수 있다. 하지만 심장에서 분출된 피가 온몸을 돌아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데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수축.확장기 혈압이 80~120mmHg인 정상인의 경우다.
비정상적인 혈압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전후 처리 과정의 일화. 1945년 4월 뇌출혈로 급서(急逝)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10년 넘게 고혈압으로 고생했다. 사거(死去) 두 달 전 영국.소련의 정상과 머리를 맞댄 얄타 회담에서 그의 쇠진한 모습은 역력했다. 비만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처칠 영국 총리도 여독을 풀지 못해 회담 내내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열강의 힘겨루기는 스탈린의 소련 쪽으로 승부가 기울었다는 게 사가(史家)들의 평가다.
하지만 얄타에서 미소 지은 스탈린 자신도 고혈압의 굴레를 떨치지 못했다. 8년 뒤 73세 나이에 그 합병증인 뇌혈전으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말 없는 살인자\` 고혈압은 지위고하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서른 살 이상 한국인 넷 중 한 사람꼴로 고혈압 환자다. 고혈압 관련 질환은 장.노년층 사망 원인의 으뜸을 다툰다. 자각 증상조차 느끼지 못하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시나브로 찾아와 거꾸러뜨리는 자객 같은 존재다.
의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꼽히는 \`혈액 순환론\`은 \`증기기관의 발명\` 못지않게 영국이 뽐내는 혁명적 발견이다. 17세기 초반 윌리엄 하비라는 의사의 공로다. \`피는 간에서 생성돼 심장을 통해 온몸에 퍼져 소멸한다\`는 고대 의성(醫聖) 갈레노스의 학설을 1400년 만에 뒤엎었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혈압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또 나왔다. 유럽 16개국 1만50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행복은 부유함보다 혈압 수치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도를 혈압으로 재 보면? 언뜻 대량 실업, 빈부 격차, 경제 양극화, 국정 마비, 무한 경쟁처럼 \`혈압 올라가는\` 말들이 떠오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최고라니 긴 설명이 필요 없겠다. 그뿐인가. 맵고 짠 음식에, 세계 2위 술 소비국인 데다, 비만.노령 인구는 늘어만 가니 혈압 수치 떨어지기란 더욱 난망. \`사회적 고혈압\`이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도지기 전에 하비 같은 명의(名醫)가 등장해 용한 처방이라도 내려 주길 바라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