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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 인혁당 사건 무죄선고
Date. 2007.01.29
인혁당 사건 무죄선고 법원 `무덤의 고요\`보다 `정의의 실현\` 선택 07.1.23 (서울=연합뉴스) 법원이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유신정권 긴급조치 위반으로 사형이 집행된 8명에게 무죄를 선고해 수사ㆍ재판의 위법성과 재판의 오류를 인정했다. 인혁당 사건은 현대사의 암울했던 각종 의혹사건 중에서도 유신정권 시대에 자행된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건이자 정치권력에 예속된 사법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손꼽혀 왔다. 1975년 4월9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8명에 대해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 재심 기회를 원천 박탈해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유신정권 시절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법원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솔직히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권 안보 차원에서 희생양이 필요하면 정보기관이 희생자를 선별해 고문과 조작을 통해 허위진술을 받아내고 검찰은 정보기관의 입맛에 따라 기소, 법원 역시 정권의 요구에 부응하는 판결을 내렸던 `전근대적 형사사법 절차\`의 오류를 인정한 셈이다. 재판부는 숨진 피고인 8명에게 적용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ㆍ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 사유가 아닌 사안을 제외한 모든 판단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유신정권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또한 당시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서가 조작됐거나 강압적인 상태에서 작성됐다는 점을 인정해 아예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진행한 재판에서 작성된 공판조서조차 검사ㆍ변호인 신문 때마다 피고인들의 진술이 달라지고, 진술내용도 앞뒤가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 등을 들어 증거로서 유죄를 입증하기에 부족하다고 못박았다. 법질서를 추구하는 법원 입장에서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채 법적 안정성만 추구하는 `무덤의 고요\`도 나쁘지만 정의를 앞세우다 법적 안정성이 무너지면 사회가 불안정해진다는 점에서 재심 자체가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이번 무죄 선고로 `사법부 과거사 정리\`에 한 획을 긋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밝혔던 대로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적극 되짚어 보고 국민에게 잘못을 솔직히 고백했다는 점에서 재심 결과는 최근 `법조비리\` 등으로 실추됐던 사법부 권위와 신뢰 회복이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인혁당 재심 재판은 유인태 의원과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 시인 김지하씨 등 일반 형사재판에서는 보기 드문 유명 인사와 40여명이라는 많은 증인이 나와 당시 상황을 생생히 증언해 눈길을 끌었으며 재심 결정에 3년, 재심 선고에 1년 가량이 소요된 끝에 무죄 선고로 끝을 맺었다. ♣인혁당 사건 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발표한 사건. 약칭 인혁당사건이라 한다. 중앙정보부는 발표에서 "인민혁명당은 북괴의 노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한 것"이라고 수사의 경위를 발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발표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는 특별조사단을 구성, 고문사실과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서는 동시에 무료변론을 맡기로 했다. 중앙정보부에서 예심을 마친 사건 피의자들은 8월 17일 검찰에 송치,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검사들의 수사를 받았는데,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검찰 내부도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 사건의 기소가치 여부로 공안부 검사들과 검찰 고위층의 견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또한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진상이 폭로되면서 검찰은 재수사에 나섰다. 재수사 결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된 26명 가운데 학생을 포함한 14명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하고 나머지 12명에 대해서는 공소장을 변경, 국가보안법 대신에 반공법 4조 1항을 적용시켰다. 1965년 1월 20일 서울지방법원 선고공판에서 도예종 (징역 3년)·양춘우(징역 2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5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5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