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제9사단장 노태우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
10·26사건으로 박정희대통령이 살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
환과 계엄사령관을 맡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사이에는 사건수사 방향과 군 인사문
제를 놓고 갈등이 깊어졌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인사권을 휘둘러 자신을 무력화(無
力化)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틀어
쥐기 위해 정승화에게 선제공격을 하기로 했다.
이 반란사건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외에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제1군단장 황영
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제20사단장 박준병,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등이 가담했다.
전두환은 군부 안의 이 하극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
아 10·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하며 수사 방향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구
실을 만들었다.
79년 12월12일 저녁 한남동 공관에서 부인과 함께 외출 채비를 하던 정승화는 합수
부 및 보안사 관계자들에 의해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합수부로 강제연행되었다.
이 일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뤄졌고 최규하는 신군부의 협박에 굴복
해 이튿날 새벽 이 사건을 승인했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혐의로 기
소, 80년 3월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80년 5·17사건을 일으켜
제 5공화국의 권력을 획득했다.
12·12사태는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93년 초까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김
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으며, 94년 5월 13일 정동년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했다. 같은 해 10월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으나, 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계속됐다. 그해 7월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게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해 11월 비자금
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
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검찰은 12·12와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구속 수감됐다. 같은 달 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
과했으며 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 및 5·18, 비자금 관련 공
판이 진행됐다.
재판부는 97년 『12·12는 명백한 군사 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단정,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
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96년 12월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
과 2,626억원이 추징이 선고됐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97년 12월 특별사
면으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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