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
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
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 1차ㆍ2차 인혁당 사건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난 64년과 74년 두차례였다.
\`1차 인혁당사건\`은 64년 8월14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통해""북
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중에 있다""고 발표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
려졌다.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은지 10년이 흐른 74년 4월,\`2차 인혁당 사건\`으로 더 잘 알려
진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
연맹)을 수사하면서 배후ㆍ조종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 이를 북한의 지령
을 받은 남한내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한 사건이다.
유신 2년째인 74년은 재야단체,학원가의 반체제 데모가 잇따르고 일부 언론인, 교
수,종교인,재야인사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개헌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유신체
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던 시기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
고 정부전복과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 74년 4월 25일 중
앙정보부의 발표 내용이었다.
민청학련 1천24명이 연루된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에서 2백53명이 구속
송치됐고 이 가운데 인혁당 관련자 21명,민청학련 관련자 27명 등 1백80여명이 긴급
조치 4호,국가보안법,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됐다.
75년 2월 이철,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 또는 형 집행정지로 석
방됐지만, 결국 75년 4월8일 대법원은 도예종 등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
형을 확정했고 국방부는 재판이 종료된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관련자 혐의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데다 조사과정중 고문사실까지 밝
혀져 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한 유신정권의 용공조작이라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2002.9.12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당시 중앙정보부는 도예종씨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
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조사
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
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혔고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인혁당 사건이 고문 등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문사진상규
명위원회의 2002년 조사결과를 근거로 그해 12월 법원에 재심청구를 냈다. 그러나 재판
부는 2003년 9월과 11월 두차례 심리를 연 뒤 기록검토 등을 이유로 심리를 미뤄오다가,
1년8개월 만인 2005년 7월에 심리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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