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와 역사 사이
1993년 10월 북한 사회과학원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동남쪽에서 민족의 시조 단군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조선 후기부터 ‘단군릉(檀君陵)’으로 전해오는 무덤을 발굴했더니 남녀 두 사람의 뼈가 나왔고, 연대 측정 결과 단군의 건국 시기인 기원전 2333년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 해 뒤 만주 장군총 모양을 본떠 화강석 1994개를 쌓아 올리고 한 변 50m, 높이 22m의 거대한 단군릉을 중건했다.
단군릉은 무덤 양식과 출토 유물이 4세기 이후 고구려 것이다. 북한이 썼다는 연대측정법도 오차가 커서 몇십만 년 되는 오래된 유물에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군을 고조선 건국 과정이 담긴 신화로 받아들이는 우리 학계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조상신으로 평양과 구월산에서 전승되던 단군이 민족의 시조신이 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국민의 동질감을 키우기 위한 공동 조상으로 단군을 선택했다.
오랫동안 구전되던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통해 문자로 기록됐다. 조선 세종 때엔 평양에 단군사당이 서고 나라가 펴낸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자리잡았다. 고려 몽골 침략기와 한말~일제시대처럼 민족이 어려울 때엔 극복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곤 했다. 1970년대부터는 국사 교과서에 단군을 역사로 쓰자는 재야 사학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최근엔 통일의 이념으로 ‘단군민족주의’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육부가 새 학기 고교 국사 교과서의 단군 부분을 강화하기로 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를 ‘건국하였다’라는 단정적 표현으로 바꾼다. 단군에 대한 교과서 서술이 소극적이라는 일부 지적을 받아들인 결정이다.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으로 단군 교육을 강화하라는 주문이 정치권 등에서 제기돼 온 것과도 무관치 않다.
이번 교과서 수정이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학계 다수 의견에 따르지 않고 1000년이나 끌어올려 기원전 20세기로 한 것은 단군에 맞추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국사 교육은 민족적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민족 강박’에 눌려 학문적 근거를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도 터무니없는 ‘단군릉’을 마음 속에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