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姓氏)는 혈족 관계를 나타낸다. 인류의 모듬살이가 혈연을 바탕으로 발전하였으므로 혈족마다 고유한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성씨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처음에는 주로 지역적 특징을 따서 성을 삼았으나, 사회가 커지면서 성씨도 여러 갈래로 분화하게 된다. 일례로,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은 국호에서 성을 땄으며, 백제를 세운 온조(溫祚)는 출신지인 부여(扶餘)를 성으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씨 설화와 함께 유리왕 때에 이르러 6부 촌장에게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裵)·설(薛)씨를 내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경우 신라 말까지는 함부로 성씨를 사용하지 못했다. 성씨가 하나의 신분이며, 사회 계급의 징표였던 셈이다. 고려 문종 때만 해도 성이 없는 사람에겐 과거응시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니, 11세기 중반 무렵까지도 성을 부여받지 못한 계층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노비, 백정 등 천민 계층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구한말인 1909년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비로소 모든 백성이 버젓이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그 호적법이 남성 우월주의를 표방한다며 성토 대상이 되고 있으니, 사회가 그만큼 다양화되고 있다는 증거다. 호주(戶主)를 승계하는 순서가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 등 직계 남자로 정한 것이 가장 대표적으로 꼽힌다. 마땅히 승계할 남자가 없는 경우에도 아내는 출가하지 않은 딸과 손녀 다음으로 되어 있다. 갓 젖을 뗀 세살배기 손자가 여든살의 할머니를 거느리는 호주로 등재되는 폐습이 존재하는 한 여성차별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항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법제처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현행 제도가 남녀평등 이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개선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가족제도 자체가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밖에도 재혼 자녀의 성씨 문제와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간다는 전통관념을 반영한 부가입적 등 논란거리가 수두룩하다. 이런 논란이 본격적인 국제화 시대를 맞아 갖가지 희한한 성씨를 취득하면서까지 한국인으로 귀화한 외국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