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향약(鄕約)실시
향촌은 말단 행정구역으로 기초적인 지배 기반이다. 그러므로 향촌에서의 지지 기반의 확립은 통치체제의 확립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세력들은 성리학의 윤리질서·통치질서를 향촌에 정착시켜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지배 세력으로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小學의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서 향약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소학 소재의 呂氏鄕約 보급 운동은 단순히 性理學의 제도 하나를 보급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세력의 비리로 한계점에 이른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방도로 제시된 것이었다.
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세력들의 주도하에 보급된 향약은 성종 19년(1488) 6월에 復立된 유향소(留鄕所)를 토대로 하여 실시된 것이다. 유향소는 향촌교화의 한 방법인 향사(鄕射)·음례(飮禮)의 실행을 통해 在地的 기반을 가진 士族세력 중심의 향촌 자치체제 확립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향촌질서 확립의 방법으로 향약이 거론된 것은 중종 12년(1517) 6월 함양(咸陽)유생 김인범(金仁範)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준행하여 풍속을 바꾸자는 상소를 올리면서 부터이다. 이에 중종은 김인범의 상소는 날로 경박해지는 인심과 천박한 풍속을 三代의 정치로 회복하자는 것이니, 풍속을 바꿀 방도를 강구하라고 의정부에 전교 하였다. 여씨향약 보급시행이 공인된 중종 12년에는 이미 조광조, 김식(金湜), 박훈(朴薰)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위는 단지 중종의 정치적 신임만을 통해 획득한 상대적인 우세로서, 기존세력을 제압하고 획득한 실질적인 우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향약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급되지 못하고, 감사로 임명되어 任地로 나간 신진세력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보급되었다.
결국에 향약이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급론이 대두되면서 서울에서의 향약 실시에 많은 물의가 일어 반대 세력들의 반발이 심하자 중종은 향약의 혁파를 명하였다.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향약 보급 운동은 사회적으로는 향촌사회의 재구성을 모색했던 것이고,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정착될 수 있는 사회적인 토대를 닦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향약 보급 운동이 조광조의 몰락과 함께 실패로 끝난 것은, 아직까지는 사회 전반적으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약은 성리학의 이념이 보편화되고 성리학의 이념에 철저했던 사림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했던 다음 시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2) 賢良科 실시
堯·舜·禹 三代의 王道政治를 시행하기 위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소학 소재(所載)의 여씨향약을 향촌 사회에 보급하여 성리학의 질서체계를 정착시켜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그 기반을 토대로 해서 왕도정치를 구체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윤리질서를 향촌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시행하였던 향약과 더불어, 향거이선(鄕擧里選)의 정신으로 새로운 인재등용법인 賢良科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중종 13년(1518) 조광조가 발의한 현량과는 漢의 賢良·方正科를 본뜬 것으로 外方은 감사(監司)·수령(守令)이, 京中은 弘文館·六卿·대간(臺諫)이 재행(才行)이 있고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면 임금이 對策으로 取才한다는 인재등용 법이다.
현량과의 실시 목적은 경학(經學)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추구하는 개혁정치에 뜻을 같이 하는 지지세력들을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정치세력을 강화하려는 데에 있었다. 현량과를 시행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을 보면 과거는 시부(詩賦)로 인재를 뽑기 때문에 사장(詞章)만을 일삼고 性理의 학문을 소홀히 할뿐만 아니라, 벼슬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면 얻을까 궁리하고, 얻고 나면 놓치게 될까 봐 근심하는 폐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장(詞章)을 위주로 하는 과거로는 경학에 능한 신진세력들을 등용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德行을 보고 천거하는 현량과를 시행하면 분경(奔競)하는 폐습이 사라질 뿐더러 大賢人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詞章을 위주로 하는 기존의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조정대신들은 현량과의 실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즉 경학을 위주로 하는 신진세력들이 천거제(薦擧制)인 현량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여 그 세력이 강화되면, 사장을 위주로 하는 기존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때문이다.
현량과 시행에 대한 찬반 논의가 분분하자, 중종은 옛적에는 향거이선(鄕擧里選)으로 인재를 뽑고 과거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덕행이 당시 사람들의 추앙 받는 바가 되었는데, 지금은 中外의 과거한 사람들은 그의 재주는 알 수 있어도 마음과 행실은 잘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대신들은 힘써 찾아내어 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현량과의 천거책취(薦擧策取)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하라고 의정부에 전교